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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부정공>증통훈대부사복시정만오공휘기현묘갈명(贈通訓大夫司僕寺正晩悟公諱基賢墓碣銘)
贈通訓大夫司僕寺正晩悟公諱基賢墓碣銘 湖南昇平之鄕有一先輩不求聞達修德行義久爲士民之所誦慕者曰晩悟處士趙公諱基賢字子俊以元陵己巳九月三日生八歲而孤哀痛惻怛衰絰受吊有同成人母夫人忍痛慰撫曰此兒庶使其父不死於世也及長文藝夙就筆畫遒勁嘗治擧子業不售有司從遊性潭宋先生之門受知最深因送子請學焉每以早年失怙爲至恫奉母夫人志體之養備盡孝敬事無大小靡敢自專丁卯遭艱年方六旬而執禮哀戚三年知一日己巳大歉賙恤其隣里鄕黨數十百家賴以全活奉先追遠尤盡其誠祭致著存墓具儀物治家謹嚴覡巫不入敎子弟以義方御婢僕以寬裕待人接物忠厚誠信見有窮乏輒先施予有外兄安公鈺好擧而賓公爲之買隣以救涸轍文酒相歡白首不替良辰美景常會賓客風流儒雅令人歆豊艶盖其平日麗澤類皆省內名士而守土諸宰多造門致敬焉晩癖 於古詩詩亦典雅有遺稿一冊藏于家 仁陵辛未閏三月二十八日不幸以時沴卒旅戚知舊不念大疫之有忌莫不匐入臨亦可見仁感人者深矣葬本郡松光面山別里亥麓此其六十三年始終也嗚呼公以溫良純粹之姿兼忠厚側怛之性孝悌行於家惠澤洽于人儻得羽儀王朝展布所蘊則致君澤民何患不如古人而乃婆娑邱林以沒其齒豈不惜哉然人之能有諸巳耳苟有諸巳初無加捐焉耳趙系出淳昌高麗侍中諱璋爲上祖世襲冠冕後有諱瑜號虔谷官副正麗社屋守罔僕義是生諱崇文官節度使 贈兵曹判書謚節愍値我端宗遜位與子 贈敎官哲山同日騈命於內子六臣禍兩世並旌閭享祠曰雲山郡守夏亨曰世熙曰正臣曰顯坤寔公高曾祖禰而仁川李光澤其外祖也公娶海州崔師錫女擧二男二女後娶咸陽朴柱昇女擧三男鎭權鎭祿鎭孫鎭豊鎭奭婿延日鄭在周長澤高時萬也孫男英浩龍浩在浩女朴齊文盧龜鉉妻長房出龜浩二房出沂浩平浩安命升妻三房出明浩邦浩四房出副司果元浩崗浩李瓚根妻五房出餘不盡記承東孫秉贇講不明不仁之戒以公族孫寅錫所爲狀固請樹徑之文不佞辭非其人而顧今天理民彛一切掃地遺親後君見利忘義者淊淊皆是則如公卓異之行尤不可任其晦昧而無傳也遂忘僭汰而爲之敍系以銘銘曰猗歟晩翁南土善士行敦孝弟學究經史潛光鏟跡念斷責紫捐才活人惠治鄕里顧今衰季其誰與此厚旅之報百世可竢有封四尺松光之峙欲知公者盍觀於此 月城 崔永祚 撰 증통훈대부사복시정만오공휘기현묘갈명(贈通訓大夫司僕寺正晩悟公諱基賢墓碣銘) 호남 승평의 고을에 한 선배(一先輩)가 있어 명예를 탐하지 아니하고 덕을 닦고 의를 행하여 영원히 선비와 백성의 외우고 추모한 바 된자 있으니 가로되 만오처사 조공 휘 기현(基賢)이었다. 자는 자준(子俊)이요 원릉(元陵) 기사(一七四九)년 九月 三일에 출생하였는데 八세에 아버지가 별세하매 애통망극하고 상옷과 질대를 갖추고 성인같이 조문을 받드니 모부인이 슬픔을 참고 위로하며 이 애가 그 아버지로 하여금 세상에서 이름이 묻히지 않게 하겠다 하였다. 장성하매 문예가 일찍 진취하고 필체가 절묘하여 일찍 과거 공부에 힘썼으나 유사(有司)에게 아부하지 아니하고 성담 송선생(性潭宋先生) 문하에 종유하여 받아 안 것이 가장 깊었으며 인하여 아들을 보내 배우기를 청하였다. 매양 어려서 아버지께서 별세 한 것을 지극히 슬퍼하여 모부인을 받들며 뜻과 몸을 효도와 공경을 다하여 봉양하고 일의 대소가 없이 감히 전단(專斷) 아니하였다. 정묘년에 六十 노인으로 모부인 상을 당하여 예제를 지켜 三년을 하루같이 애통하고 기사년 흉년에 그 이웃과 마을을 구제하여 향방(鄕方) 수십 백호가 힘입어 살았고 선영을 받들어 추모함에 더욱 그 정성을 다 하였으며 제사에 시도를 모신 것 같이 경건이 모시고 묘소에 석의(石儀)를 갖추었다. 집안을 근엄하게 다스려 박수와 무당을 들이지 아니하고 자제를 교훈하매 의리로써 하며 비복을 관후하게 거느리고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할 때 충후성신(忠厚誠信)하며 궁한 것을 보면 문득 먼저 구제하였다. 의종형 안공 옥(鈺)이 학문을 좋아하고 가난하니 공이 이웃에 집을 사서 집없는 근심을 덜게 하고 글과 술로 서로 화합하며 평생을 같이 하였다. 좋은 때와 아름다운 경치에 항상 손님을 모아 유도의 바른 의지로 사표(師表)가되니 방인이 선망하였다. 대개 그 평일에 서로 도와 학문을 강마한 사우(士友)가 다 그 고을명사요 지방 수령이 많이 문하에 와서 경의를 표하였다. 만년(晚年)에 고시(古詩)에 취미를 붙여 시(詩)가 또한 법칙에 맞고 아담하며 유고 一책이 있어 집에 수장하였다. 순조 신미(一八一一)년 윤 三월 二十八일에 불행히 유행병으로 별세하니 족척지우가 큰역질을 꺼리지 않고 달려와서 조위하니 또 가히 어진 덕행이 깊이 사람을 감동하였음을 보겠도다. 본군(本郡) 송광면 산별리 해록(亥麓)에 안장하니 이것이 그 六十三년 시종(始終)이다. 아! 슬프다 공이 온량순수(溫良純粹)한 자질로써 충후칙탄(忠厚惻怛)한 성정을 겸하여 효제로써 집을 정제하고 혜택이 사람에게 미쳤는데 고상한 의용으로 왕조에 서서 포부를 발양하여 충근치민(忠君治民)하였으면 어찌 옛 사람만 못 하겠는가. 이에 림천(材泉)에 우유(優遊)하여 써 몸을 마치었으니 어찌 애석치 아니하랴. 그러나 사람이 능히 모든 것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한 것을 근심하나 진실로 자기에게 있다면 처음부터 더하고 덜한(加損)것이 없을 것이다. 공은 순창인인데 절민공 숭문(節愍公崇文)의 후예로 고조는 雲山郡守 하형(夏亨)이요, 증조는 세희(世熙)며 조는 정신(正臣)이고 고는 현곤(顯坤)이며 인천(仁川)이 광택(李光澤)이 그 외조였다. 공이 해주최씨(海州崔氏) 사석(師錫)의 녀를 취처하여 二남二녀를 두고 뒤에 함양박주승(咸陽朴柱昇)의녀를 취처(取妻)하여 三남을 두었는데 진권(鎭權) 진록(鎭祿) 진손(鎭孫) 진풍(鎭豊) 진석(鎭奭)이요, 녀는 연일 정재주(延日鄭在周) 장택고시만(長澤高時萬)의 처이며 손남 영호(英浩) 용호(龍浩) 재호(在浩)요 손녀는 박제문(朴齊文) 노귀현(盧龜鉉)의 처인데 장방출이요, 귀호는 二방출이며 기호(沂浩) 평호(平浩) 안 명승(安命升)의 처는 三방출이고 명호(明浩) 방호(邦浩)는 四방출이요, 부사과 원호(元浩) 강호(崗浩)이 찬근(李瓚根)처는 五방출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치 아니한다. 증손 병윤(秉贇)이 불명불인(不明不仁)의 경계에 따라 공의 족손 인석(寅錫)이 기술한 장문을 보이며 묘도(墓阡)에 새길 명문을 청하므로 내가 굳이 사양하다 돌아보니 이제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벼리가 일체 쓸어버린 것 같아 인군과 어버이를 생각치 않고 이 끝을 보면 의리를 잊어버린 자 물 넘치돗 많은데 만일 공의 특이한 사행을 더욱 더 다 꺼져 없어지게 한 것은 불가하므로 마침내 참람함을 잊고서 이어 새기되 거룩한 만옹은 남방의 착한 선비로(猗歟晩翁南土善士) 행실은 효도와 우애를 도탑게 하고 학문은 경서와 사기를 연구하였다. (行敦孝弟學究經史) 빛을 갖추고 자취를 숨겨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潛光鏟跡念斷責紫) 재물을 나누어 주어 사람을 살리니 혜택이 향리에 가득하였네(損才法人惠洽鄕里) 이제 쇠퇴한 세대를 돌아보면 그 뉘가 더불어 짝이 되고(顧今衰季其誰與此) 풍후하게 베푼 보담은 百세를 가히 기다리로다(厚旅之報百世可竢) 四척 비갈이 있는 곳은 송광의 우뚝한 재니(有封四尺松光之峙) 공을 알고저 한 자는 어찌 이에 보지 않겠는가(欲知公者盍觀於此) 월성(月城) 최영조(崔永祚)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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